[202108]레지오 영성2
미르얌, 신비로운 그릇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인간은 ‘자아’(ego)라는 주인의 압제에 종살이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각자는 자아가 원하는 재물과 쾌락, 명예의 욕망을 채워주며 시간을 허비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아의 압제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를 때는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결단이 ‘세례’이며,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파라오가 자아라고 하면 모세는 그리스도이고 그를 따라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군대를 수장시키는 사건이 세례입니다. 이때 모세의 누이인 ‘미르얌’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탈출 15,21)
그리스도는 자아에 종살이하는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자아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당신의 “멍에”(마태 11,30)를 메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메어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르얌의 해방의 노래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해 완성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를 이렇게 종합해 설명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1-4)
미르얌은 이 구원의 신비를 노래하는 신약의 성모 마리아의 상징입니다. 성모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구원을 성취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구원된 기쁨을 노래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생명의 본성으로 변화된 첫 인물
‘미르얌’의 이름은 ‘마리아’의 이름처럼 구원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홍해를 건너고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것은 척박한 광야였습니다. ‘마라’라고 하는 곳에 다다라 물을 발견했지만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라’는 ‘(맛이) 쓰다’라는 뜻입니다. ‘물, 바다’는 ‘얌’이라고 합니다. 마라의 샘은 ‘마라’와 ‘얌’이 합쳐져 ‘미르얌’이 됩니다. 성경은 미르얌이라는 여인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마라의 쓴 물의 본성이 단물로 변화되는 것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생겼을 때, 하느님은 모세에게 ‘나무’ 하나를 ‘가리키십니다.’ 여기서 ‘가리킨다.’라는 동사 ‘야라(yarah)’의 명사형은 ‘토라(Torah)’입니다. 토라는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리키신 나무는 하나의 ‘법규’를 상징합니다. 모세오경을 토라(율법)라 하는데, 신약의 모세오경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그리스도라는 나무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꾸기 위해 물속에 던지라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나무는 바로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그 나무를 쓴 물에 던지니 단물이 되었습니다. 본성이 변하여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하나가 된 사람은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다른 이에게도 생명의 물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마라의 쓴 물이 변화된 이 사건은 앞으로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믿음을 증진시켜 본성을 변화시켜야 할 것인지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마라의 쓴 물처럼 마실 수 없는 쓸모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본성이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와 같은 일이 1300년경 이탈리아 카시아(Cascia)에서 있었습니다. 한 사제가 성무일도 책 안에 성체를 넣어 병자에게 가던 중 그 성체가 피로 변해 책 양쪽 페이지에 붉고 둥그렇게 스며들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 그 종이는 감실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낱 종이였는데 자신 안에 스며든 성체 덕분으로 감실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종이는 감실에 넣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체나 성체를 담은 그릇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에 성체가 스며들면 그 종이도 성체를 담은 그릇이 됩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이기에 그 성체를 받아들인 사람도 그리스도를 모신 성전이 됩니다. 성체가 스며든 종이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감실에 모시듯, 그리스도를 모신 신앙인도 하느님의 거처에 합당한 곳으로 옮겨져 살게 될 것입니다. 종이가 성체와 하나 됨 없이 감실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하나 됨 없이는 본성이 변할 수 없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과 하나가 되신 분이 신약에서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미르얌’의 신약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죽은 본성이 생명의 본성으로 변화된 첫 인물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래서 구원을 위해 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자아가 죽을 때, 즉 겸손해질 때 그만큼 증가해
쓴 물이 단물로 변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나무를 쓴 물에 던졌습니다. 루카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라의 기적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반복하시며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안에 믿음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바다는 쓴 물입니다. 미르얌이고 마리아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믿음으로 생명나무를 잉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다’라는 이름을 지닌 성모님께 심어진 돌무화과나무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생명나무를 세상에 내어주시어 수많은 사람이 또한 단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심겨지는 돌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하신 직후, 바로 ‘겸손한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루카 17,7-10 참조). 이는 믿음과 겸손이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아가 교만이기에 믿음은 자아가 죽을 때, 즉 겸손해질 때 그만큼 증가합니다. 모세도 교만했다면 ‘나무 하나를 마라의 쓴 물에 넣어서 무슨 이득이 있으랴?’라고 하며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겸손한 종은 할 일을 다 마치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마치 엘리야가 제단에 소를 바칠 때처럼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봉헌하심으로써 하늘에서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셨습니다(1열왕 18,33-38 참조).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성령을 위한 불쏘시개로 봉헌하셨습니다.
이처럼 오직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겸손한 주님의 종들에게만 생명수로 변화되는 구원이 주어집니다. 이때 쓴 물과 같았던 우리도 구원의 기쁨으로 ‘미르얌의 노래’, 혹은 ‘마니피캇’을 진심으로 외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