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허영엽 신부의 ‘나눔’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을 기원하며

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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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12월3일 세 명의 소년들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납니다.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 위를 걸어서 국경을 넘어갑니다. 그들은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수업을 받기위해 길을 떠난 15살의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천주교회가 조선인 사제로 양성하기 위해 뽑은 교회의 인재들이었습니다.
세 명의 소년들은 천신만고 끝에 1837년 6월7일 초여름에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반년 이상이 걸린 긴 여정이었습니다. 어린 소년들 앞에는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기후와 음식과 문화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소년들의 유학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유학 첫해인 1837년 11월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학생은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남은 두 명,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의 어깨 위에 한국 교회의 운명이 달려있었습니다
유학 생활 중 최양업 신학생을 지도한 교수 신부님들의 서한에서 보면 칭찬 일색입니다. 최 신학생을 지도했던 스승들은 “최양업 토마스는 천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주신다면 조선 선교를 위해 아주 유익한 사제로 활동할 것이며 많은 재능을 갖고 있고 특히 외국어를 잘하고 좋은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스승들의 이러한 좋은 평가처럼 최양업은 조선 교우들을 위한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습니다.
그 뒤에도 최양업 신학생은 조선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계속했지만 여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47년 초 페레올 주교님이 보내온 편지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어로 쓰인 편지 내용 중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훗날 79위 복자가 탄생하는 가장 기초적인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최양업 신학생은 1849년 4월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귀국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는 여섯 차례나 시도한 끝에 비로소 1849년 말 조선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조선 복음화의 선구자이며 가톨릭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제
최 신부님은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주로 남부 지역의 험악한 산악지대 교우촌을 중심으로 성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남부 다섯 개 도에 걸쳐 사목 순방을 한 거리가 대략 오천 리 정도였고, 만난 교우 수는 3815명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열악한 교통수단과 험한 산골짜기를 찾아다닌 것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사목활동이었습니다. 첫해 사목 방문을 끝내고 스승 신부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은총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저의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의 애정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 그들은 박해를 피해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1850년 10월1일)
최양업 신부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동시에 시복을 위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를 편찬했습니다. 교리서 ‘성교요리문답’, 기도서 ‘천주성교공과’, 천주가사 ‘사향가’ 등 최 신부님의 저술은 한국천주교회 공동체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최 신부님은 한마디로 조선 복음화의 선구자이며 가톨릭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제였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조선 팔도를 누비던 최양업 신부님은 1860년, 마지막 성무 활동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과로와 병이 겹쳐 선종하고 맙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마치 당신의 선종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1860년 9월3일)
최양업 신부님의 삶을 알면 알수록 정말 우리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억되고, 교회발전의 초석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2월28일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전국에서 일제히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3월1일 최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최 신부님의 시복을 기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우리나라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 신부님의 시복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2년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부터였습니다. 물론 시복이 처음 추진된 것은 그에 앞서 1990년대부터였습니다. 최 신부님은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여서 시복 추진에 사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순교자나 증거자의 시복을 추진하는 이유는 시복 대상자 개인의 영광보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복 대상자들의 삶을 본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라틴어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한 정진석 추기경님
최양업 신부님은 여러 통의 라틴어 편지를 남기셨는데 이 편지들은 초대 한국교회사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옥과 같은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라틴어 실력은 그를 가르치던 외국 신부님들도 놀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오래된 라틴어 편지들을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찾아내어 오랜 시간동안 노력을 기울여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여 그분의 진면목을 알려주신 분은 바로 정진석 추기경님입니다.
청주교구장 시절 우연한 기회로 최 신부님의 라틴어 편지를 접하게 된 정진석 추기경은 이내 그분의 영성과 사목활동에 매료됩니다. 정 추기경은 한여름 삼복더위에 오전 3시쯤 매일 기상하여 몇 시간씩 번역에 몰두했습니다. 해가 뜰 무렵엔 손이 닿은 원고지가 땀이 흥건히 젖었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합니다. 최근에 정 추기경은 “내가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번역한 것도,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우리 교회가 잘 보관을 해온 것도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섭리 같다.”고 회고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과 같은 선배 신앙인들의 피와 땀이 바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의 깊은 뿌리가 되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하루빨리 복자품에 오르시기를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사진> 배티성지의 최양업 신부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