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이달의 훈화
부활 제3주간 - 부활 제6주간

이창영 바오로 신부
image_print

이창영 바오로 신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 라테라노 대학교 성 알폰소 대학원 윤리신학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생명윤리위원회 총무, 가톨릭 신문사 사장, 매일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성당, 만촌1동성당 주임신부를 역임했다.


부활 제3주간(4월 18-24일)
“하느님의 은총은 몇 킬로그램일까?”

혹시, 여러분 옆에 이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첫째, 나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멋지고 매력 있고 잘생긴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사람. 둘째, 내가 무엇인가 실수나 잘못했을 때 용서를 빌기도 전에 나를 감싸주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셋째, 나의 부족함을 늘 이해해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
만약 이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다면 정말이지 축복이자 은총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분이 딱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당신의 은총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은총은 “감사하다. 기뻐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은총은 고맙게, 감사하게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총은 일차적으로 거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행위 자체와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좋은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영적, 물적 예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거저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솜뭉치 1000킬로그램이 더 무겁겠습니까? 아니면 쇳덩이 1000킬로그램이 더 무겁겠습니까? 둘 다 똑같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쇳덩어리 1000킬로그램이 더 무거울 것 같지만, 솜뭉치나 쇳덩이나 둘 다 똑같은 1000킬로그램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그저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질량의 은총일 뿐입니다. 남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자신의 눈에는 더 커 보일 뿐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일 뿐입니다.
엿장수가 엿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 정의에 입각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엿장수 마음대로 주는 것입니다.


부활 제4주간(4월 25일-5월 1일)
“내 삶의 그릇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나?”

인간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게 닮은 동물이 있다면 어떤 동물이겠습니까? 바로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이 뛰어나고, 얼굴 생김새나 행동이 인간과 가장 비슷합니다. 그런데 혹시 원숭이를 가장 쉽게 잡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원숭이는 워낙 빠르고 나무를 잘 타서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경계심이 많아 원숭이를 속이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간단한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죽으로 자루를 만들고 그 입구를 좁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자루 속에는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과일을 잔뜩 넣어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들이 나타나 자루 속을 들여다보다가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좋아 날뜁니다. 그리고는 “얼씨구나!” 하면서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어 과일을 꺼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원숭이의 손은 자루 속에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원숭이는 욕심이 많아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을 잔뜩 움켜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과일을 잔뜩 움켜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에 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가가 원숭이를 잡으면 됩니다. 너무 쉽죠.
결국 원숭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욕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입니다. 먹이에 대한 집착, 자신의 손안에 움켜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결국 원숭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쓰신 책 중에 ‘텅 빈 충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텅 빈 충만! 텅 비어 있는데 어떻게 충만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을 비워 놓을 때, 모든 탐욕과 욕심을 버릴 때, 결국 우리는 텅 비어 있는 공허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가득한 자유와 사랑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텅 빈 충만! 비워내면 비워내는 그만큼, 버리면 버리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참다운 자유와 사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손에 쥐고 놓지 못하고 있습니까?


부활 제5주간(5월 2-8일)
‘정답’과 ‘오답’ 그리고 ‘실패’와 ‘성공’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오로지 정답만 찾으려고 합니다. 오차가 없는, 오류가 없는 인생의 정답만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답이라고 확신할 때는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그것이 오답이라고 생각할 때는 좌절하고,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답일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오답이라고 생각한 것이 정답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오답 속에 정답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인생의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로지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모두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률적으로 보면 오히려 실패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한 실패자들이 더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물론 성공을 한 사람도 합당한 칭찬을 받아야 하지만, 실패한 사람도 최선을 다했다면 오히려 더욱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언젠가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는 그날 인생의 정답과 오답, 성공과 실패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의 정답과 오답,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의 말씀대로 성실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 제6주간(5월 9-15일)
“내 감정에 솔직한 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어떤 일이나 고통 앞에서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고통 앞에서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그저 억지로 하느님께 감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하느님 앞에 솔직히 다 쏟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고통 앞에서 바로 이렇게 하느님께 원망도 하고 하소연도 하였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원망도 하고, 하소연도 하는 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께서도 처음부터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고, 점점 더 배가 불러오면서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하느님을 잠시나마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고민과 고통을 하느님께 하소연하고 기도하면서, 친척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 원망, 하소연, 도움, 감사의 마음 등등 이 모든 마음을 하느님 앞에 다 쏟아내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변의 친한 사람에게 우리가 가진 고민을 털어놓으면 힘도 얻고 위로도 받듯이 하느님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후련하면서 용기도 얻을 수 있지만, 하느님께 털어놓으면 인간적인 힘을 넘어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게 됩니다.
많은 고민과 아픔을 딛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신 성모님처럼 우리도 많은 고민과 아픔을 먼저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위로와 힘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도 성모님처럼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제 탄식을 살펴 들어 주소서.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제가 외치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당신께 기도드립니다.”(시편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