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내적 굳건함과 온유함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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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성덕으로 표현됩니다
신앙(faith)은 신념(믿음, belief)과 행동(action)과 태도(attitude)를 다 포함합니다. 신앙은 주님께 대한 신념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행동으로 실천되는 것이기도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주 강조하십니다. 신앙은 최종적으로 어떤 태도로 표현된다고 말입니다.
한 번의 생각과 한 번의 행동으로 태도가 형성되지는 않습니다. 태도는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할 때 자연스레 몸에 배는 것입니다. 태도는 품성이며 일종의 덕(德)입니다. 물론 가식적이고 일시적인 태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태도는 오랜 생각과 행동을 통해 형성되는 덕으로서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신앙이 태도로서 표현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은 덕(또는 성덕)으로 표현된다는 뜻입니다. 한 번의 신앙적 생각과 한 번의 신앙적 행동을 했다고 해서 성덕이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인 행동을 꾸준하게 반복해야, 자연스럽게 신앙적 태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수련과 수양을 통해 덕이 형성된다는 동양의 이치와 비슷합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요청되는 진정한 신앙의 태도와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쉽게 빠져드는 잘못된 삶의 태도와 모습을 다섯 가지로 진단합니다. 불안해하는 모습과 난폭한 태도, 부정적인 태도와 쉽게 우울증에 빠져드는 모습, 소비적인 모습과 이기적이고 게으른 태도, 개인주의적 모습, 온갖 형태의 거짓 영성에 빠져드는 것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1항).
현대인들의 이러한 경향과 대조되는,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과 태도 역시 다섯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강조하십니다. 항구함과 인내와 온유함, 기쁨과 유머 감각, 담대함과 열정, 공동체 정신과 생활, 지속적인 기도입니다(112항-157항).

하느님께 굳건히 뿌리 내리는 삶
현대의 삶은 변덕스럽고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물질과 자본과 기술과 환경의 변화속도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숨이 찹니다.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은 불안을 낳습니다. 불안은 공격성으로 드러나고 폭력을 낳습니다. 이러한 현대사회 안에서 참다운 신앙의 징표는 하느님께 굳건히 뿌리 내리는 삶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적 굳건함에 기초하여 우리는 빠르게 변하는 떠들썩하고 공격적인 세상에서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성덕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2항).
모든 것이 흔들리는 현대세계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란 어렵습니다. 속도의 미덕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숨 가쁜 경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걱정이 마음을 자꾸만 불안하게 합니다.
한편으로, 이 불안한 마음은 타자에 대한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로 드러나기도 하고, 또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들에게 대한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불안, 분노, 공격성, 폭력성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신앙인은 더더욱 하느님께 굳건히 뿌리 내리는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거친 풍랑 속에서 더욱 굳건하게 기도의 닻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기도의 닻은 우리를 다시 한번 하느님 손에 맡기고 평화의 샘으로 인도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4항)

신앙인은 모든 형태의 폭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행사됩니다. 문명화된 세상에서도 사람의 육체에 폭력을 행사하는 직접적인 폭력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곳곳에서 발생합니다. 또한 다양한 방식의 간접폭력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 가운데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과 디지털 소통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숱한 언어폭력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지옥을 보고 싶으면 네이버 댓글들을 보라고 사람들은 풍자적으로 말합니다. 도가 넘치는 지나친 비방과 폭언이 난무하며 타인의 명예에 대한 존중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들을 익명의 방식으로 주장하고, 타인을 공격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불만을 달래려는 심리적 보상의 태도를 인터넷 공간에서 자주 목격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5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이러한 세태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단속되지 않는 혀가 ‘불의의 세계’이며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음’(야고 3,6)을 이곳에서 보게 됩니다”(115항).
타인의 결점과 실수를 비난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6항). 그리고 “비정한 재판관처럼 남을 업신여기고 으스대면서 언제나 가르치려 드는 것” 역시 “교묘한 형태의 폭력입니다”(117항). 비방, 폭언, 비난, 교만한 가르침, 등의 모습으로 폭력은 다양하고 교묘하게 행사됩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이러한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은 남을 거칠게 다루는 일을 꺼립니다. 거룩한 사람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필리 2,3)”(116항).

겸손과 온유함은 모든 굴욕을 견뎌내고 이겨냅니다
우리 생의 여정은 숱한 굴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폭력의 형태가 다양한 것처럼, 우리가 생에서 겪는 굴욕들 역시 다양합니다. 때론 가족들을 위해, 때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일상 안에서 저마다의 굴욕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황지우의 시, ‘길’에서)을 자주 하게 됩니다.
삶의 굴욕들을 견디는 일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참 아름답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굴욕을 통해서만 마음에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굴욕 없이 어떠한 겸손도 어떠한 성덕도 없습니다. 작은 굴욕도 참아 내고 봉헌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며 성덕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주시는 성덕은 당신 아드님의 굴욕을 통해 왔습니다. 그분께서는 곧 길이십니다. 굴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게 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18항). “저는 그와 같은 굴욕이 달가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굴욕은 피학적 성향(masochism)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가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면서 성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120항).
굴욕을 견딘다는 것이 불의에 굴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견디는 신앙적 겸손과 온유함은 불의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부드럽지만 강한 용기와 언제나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