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레지오의 삶_마산교구 옥봉동성당 천병기 바오로
“레지오는 쉼표가 없어, 끝까지 달릴 뿐”

김영수 그레고리오 마산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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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옥봉동성당(주임신부 이재혁 안드레아 아벨리니) 천병기 바오로 형제는 진주 옥봉동성당 모든 은총의 중재자 꾸리아(단장 강용호 마르코) 소속 창조주의 어머니 쁘레시디움(단장 김윤철 보니파시오) 단원이다.
그는 1977년 10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곧바로 세례 대부의 권유로 레지오에 입단하여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레지오의 첫째가는 의무는 규칙적인 출석이다.”라는 상훈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약 44년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한 번도 결석을 한 적이 없다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필자도 취재하면서 바오로 형제의 열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레지오 단원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이지 않나?” 하는 충고에 송구함이 느껴졌다.
바오로 형제는 1979년 7월 옥봉 메디아 트리치스 꾸리아 단장을 맡게 되었고, 이어 1980년 2월26일 꾸리아가 진주지역 최초로 꼬미씨움으로 승격되었는데, 1983년 3월10일 김정식 루도비코 전 꾸리아 단장의 추천으로 꼬미씨움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44년간 단원으로 활동하며 한 번도 결석 없어
꼬미씨움 단장 재임 시 매월 레지아 평의회 참석차 광주로(마산 레지아 승격 전) 갔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개인 승용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통편도 편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완행버스를 타고 가는 불편함도 있었으며 또한 어떤 날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근처 여관에서 자고 오는 때도 있었다고 옛날을 생각하면서 웃음지었다.
옥봉 꼬미씨움 산하에 꾸리아가 19개 있었는데 바오로 형제께서는 지금의 진주3지구인 하동, 거창, 합천, 남해, 문산, 고성, 거제 등 많은 성당의 꾸리아 설립에 힘썼으며, 그때 충무(현재 통영) 꾸리아를 꼬미씨움으로 승격시키는데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꾸리아 순시를 할 때에도 대체로 저녁에 평의회를 많이 하니 버스 타고 순시를 가면 또한 막차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여 당시 부단장과 함께 여관에 자고 오는 날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한다. 바오로 형제는 평의회에서 교육을 담당할 때 제일 힘든 일은 지금은 레지아 교육위원들이 많이 선발되어 교육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여 주지만 당시에는 간부들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니 강사 구하기, 프로그램 짜기 등 많은 부분이 힘들었다. 간부를 할 때 너무 바빠서 어찌 지냈는지 모를 정도라 어떻게 보면 시간 보내는 데는 최고라고 웃으면서 다 지나간 추억이라고 얘기를 하였다.

성체조배로 신심 더욱 두터워 져
또한 성체 조배실이 마산교구에서 제일 먼저 생긴 성당이라 당시 본당 신부님께서 신심이 두터운 바오로 형제를 성체조배회 회장으로 선임하는 바람에 성체조배회까지 몇십 년을 열심히 봉사하니 하느님과 특별히 성모님께서 도와주시어 이 나이(88세) 되도록 건강하게 성당에 다닐 수 있고, 아직도 성모님의 군사로 복무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는 바오로 형제의 눈길에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좋았다는 바오로 형제의 이야기 속에 레지오 단원이면 기도는 물론 봉사 정신으로 활동해야 하며, 성모님께서 항상 도와주시고 단원들이 가는 곳마다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고 힘주어 강조하셨다. 바오로 형제를 소개해준 양진순 다리아 꾸리아 부단장은 “우리 성당의 젊은 신자들에게 많은 모범이 되시는 등불 같으신 분”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며 당부를 하는데 “레지오 단원들은 쉼표가 없습니다. 오로지 끝까지 달릴 뿐입니다.”라면서 “첫째, 레지오 단원은 열성을 가지고 활동에 임해야 하며, 둘째, 성체조배를 하면서 신심을 두텁게 만들고, 셋째, 평일미사도 자주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필자의 귓전에 맴도는 바오로 형제의 당부에 어느새 나의 발걸음이 성당 감실 앞으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