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제9장)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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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2014년 영문판)’에 대해 광주대교구 소속 안세환 신부께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번역 교본은 1993년 영문판을 번역한 것으로 1993년 이후로 수차례 부분 수정이 있었습니다. 교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한 교본의 내용을 본 코너를 통해 계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께서는 새로 번역된 교본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내용에 대해 건의가 있을 경우 상급 평의회나 월간지 편집실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내용은 검토하도록 하겠으며, 타당한 의견이나 건의에 대해서는 추후 새로운 교본의 인쇄가 결정될 경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제9장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

3.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
레지오 단원들은 사명을 수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접촉한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세상이 ‘고통’의 문제라고 칭하며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살다보면 고통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고통에 직면한다. 고통을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다가도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그저 감내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구원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옷감을 짤 때 씨줄이 날줄을 가로질러 가면서 날줄을 보완하는 것처럼, 구원 계획에 따르면, 열매를 맺는 모든 삶에서는 고통이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생의 여정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훼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생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성경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필리 1,29)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2티모 2,11-12)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우리의 죽음의 순간은,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막 당신의 사명을 그 위에서 마치시어 온통 피로 넘쳐나고 있는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다. 그 십자가 아래에는 너무도 상심하여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도 힘들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서 계신다. 그 여인은 구원하는 자와 구원을 받은 자 양편 모두의 어머니이시다. 십자가 아래에 싼 값으로 흩뿌려져 있지만 세상을 구원한 그 피는 당초 이 어머니의 혈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제부터는값진 피가 신비체를 통하여 흐르면서 모든 빈자리를 생명으로 채워 넣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총을 누리려면 성혈이 흐름으로써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전적으로 올바로 이해해야만 한다. 고귀한 성혈이 영혼 안에 흘러 들어오면 영혼은 그리스도를 닮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로서, 환희와 영광의 그리스도인 베들레헴과 타보르 산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고통과 희생의 그리스도 즉 골고타의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어느 한 모습만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한다. 성모님은 주님 탄생 예고를 받던 환희에 찬 순간조차도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계셨다. 성모님은 당신이 기쁨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부르심만이 아니라 슬픔의 여인이 되리라는 부르심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늘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겨 드리고 계셨기에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셨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아드님의 생애와 더불어 그 생애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아드님과 함께 천상의 기쁨을 맛보아야 하셨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드님과 함께 고통도 기꺼이 감내하셨다.
그 순간 성모님의 성심과 아드님의 성심은 하나가 될 만큼 아주 밀접한 일치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두 심장은 신비체 안에서 신비체를 위하여 함께 뛰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 주님의 지극히 고귀한 성혈을 받아서 전달해 주는 영적인 맥관(脈管)인 은총의 중재자가 되셨다. 성모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성모님의 자녀들도 똑같이 해야 한다. 하느님께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가는 그 사람이 성심과 얼마나 밀접하게 일치해 있는지에 늘 달려 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고귀한 성혈을 바로 그 성심에서 깊이 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심과 성혈과의 일치를 그리스도의 생애의 어느 한 측면만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생애에서 찾아야 한다. ‘영광의 왕’과 ‘비탄의 인간’ 모두 단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영광의 왕은 환영하면서도 비탄의 인간을 배척한다는 것은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일이다. 비탄의 인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영혼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명에서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영광스러운 사명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통은 언제나 하나의 은총이다. 고통은 치유를 허락하지 않는 때라도 힘을 부여해 준다. 고통은 단순히 죄에 대한 처벌이 결코 아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은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은 형법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라. 고통은 그 성격상 치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무죄하고 거룩한 이들을 당신 자신과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완전하게 닮게 하시려고, 당신의 고난을 마치 측정할 수 없는 특전처럼 그들의 몸 안에 흘러넘치도록 쏟아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을 교환하고 섞는 일은 모든 고행과 보속의 토대가 된다.
고통을 단지 인간의 몸을 관통하여 순환하고 있는 피에 비유해 봄으로써, 고통이 맡고 있는 역할과 그 목적을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된다. 손을 생각해 보라. 손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은 심장의 고동이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피는 손을 관통하여 흐른다. 손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으로서 몸과 하나이다. 손이 차가워지면 혈관은 수축되고 피가 순환하는 데에 지장이 발생한다. 손이 더 차가워지면 피의 흐름은 줄어든다. 피의 흐름이 멈출 정도로 손이 차가워지면 동상에 걸리고 세포 조직은 죽기 시작하며 손은 생기를 잃어 쓸 수 없게 된다. 그런 손은 죽은 손과 같아서 그 상태로 내버려두면 괴저(壞疽)가 발생한다.
차가움이 일으킬 수 있는 여러 단계는 신비체의 지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단계의 신앙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신비체의 지체들은 그 몸을 관통하여 흐르는 고귀한 성혈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러, 괴저에 걸려 잘라내야 하는 지체처럼 죽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사지가 얼어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나 알고 있다. 얼어붙은 사지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다시 순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수축된 정맥과 동맥에 피를 밀어 넣는 일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일종의 기쁨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가톨릭 신자 대부분은 실제로는 동상에 걸리지 않은 지체와 같다. 설령 자기만족에서 신앙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때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이 차갑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바라시는 정도의 성혈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는 억지로라도 당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넣으셔야 한다. 그분의 피는 그 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혈관을 확장시키면서 고통을 일으키며 흐른다. 그리고 이 고통은 삶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한다면, 고통으로 인한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고통을 느낀다는 것 바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모두 겪으셨다. 당신이 받아야 할 고통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다 받으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통이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머리로서의 고통은 끝났다. 그러나 몸이 겪어야 할 수난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 안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계시며 당신이 행하시는 속죄 행위에 우리가 함께 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우리가 그분의 속죄 행위에 함께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들의 몸이며, 하나는 다른 하나의 몸이기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겪으시는 모든 고통을 머리와 함께 지체들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성 아우구스티노 St. Augustine)


<바로잡습니다>
2021년 1월호, 2월호 ‘새 번역 교본읽기’의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제9장)’에 실린 “3.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사도직의 의무를 요구한다.” “4. 성모님께 봉사할 때는 온 힘을 다해야 한다.”의 내용은 ‘제6장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에 속한 내용이기에 바로잡습니다.